2022. 09. 01. 목요일 pm 1:58 / 제주도 가는 비행기 23F

 김포공항. 제주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J는 말했다. ‘미나랑 시간을 보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야. 너의 취향이 또렷해서, 어쩜 좋아하는 것이 명확할까 생각이 깊어져. 다른 친구와 네 취향 이야기를 하며 공감했어’ 기분이 오묘했다. 비행기에 타기 전, 딱 1곡의 노래를 저장하기까지 내가 들었던 수많은 노래들이 동시에 재생되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딱 한 자루의 연필에 정착하기까지, 취향을 향유하기 위하여 고민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꽃에 푹 빠져 지내던 날, 수업만 듣는 건 선생님의 디자인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꽃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와 수업에서 사용한 꽃 줄기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복습하던 시간들, 색감을 공부하기 위해 꽃 시장을 돌아다니고 숨 쉴 틈마다 디자인 레퍼런스를 찾아 연습하던 나날이 떠오른다. 꽃을 사랑하던 20대의 나는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고 싶었다. 취향을 찾아 헤매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무너지고 좌절했다. 서른하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 있었다. 

 취향을 향해 무구한 욕심이 생긴다. 특히 공간이 그렇다. 취향의 물건과 수집욕을 담기에 내 방이 너무 좁다. 이사를 가야지. 그런데 말이야, 이사를 간다고 100% 만족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닐 테지. 그 다음, 다-다음, 다다-다음 집에서도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취향이라는 욕심을 다듬어보자. 뾰족한 취향을 조금 둥글게 다듬어야지. 그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타인의 취향까지 소중하게 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취향까지 존중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돌고 돌아 만난 나의 취향처럼, 누군가의 취향도 소중할 테니까. 아.. 우선 여기까지, 비행기가 너무 흔들려서 멀미 난다..

 - 무섭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pm 2:11

 가을볕이 좋아서 옥상에서 김밥을 먹다가 문득 나의 김밥 취향이 궁금해졌다. 어릴 적에는 달큰한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밥을 좋아했다. 몸이 자주 아팠던 어느 날에 한의원을 찾아갔는데, 모든 종류의 고기와 뿌리채소를 먹을 수 없는 금양체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고기는 몸에 독이 된다고 했다. 어릴 적 집에서 고기 구워 먹는 날을 너무나 싫어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한의사 선생님을 굳게 믿고 체질식에 도전했다. 다행히 좋아하는 음식은 모두 체질에 잘 맞았다. 밥과 나물과 해산물은 듬뿍 섭취하고, 체질 식단표에서 X표시된 음식: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기타 모든 고기들과 뿌리채소 등은 먹지 않았다. 자연스레 김밥의 단골 채소인 단무지, 당근을 빼고 먹었다. 소고기 김밥은 1차 탈락! 자연스레 다른 김밥을 찾게 되었고, 김밥집에서 열에 아홉 참치 김밥을 주문한다. 체질을 알고 입맛이 단호해졌다. 어쩌면 속 편한 음식을 찾아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몸의 취향이지 않을까?

 오늘은 피망 김밥에서 단무지만 쏙 빼고 먹었다. 짠맛이 덜해 입맛에 딱 맞았다. 참치 김밥 이후로 새로운 김밥 취향이 생길 것 같아 설렌다. 사실 김밥이라면 뭐든 다 좋은데 ‘OO김밥이 내 취향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취향을 ‘좋아함의 지속성’이라 정의했다.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 나열해 보자. <계절>한여름, 초여름, 늦여름, 모든 여름이 좋다 <음식> 고기보다 해산물, 나물은 모두 좋지만 그중에서 제철 나물은 최고! 특히 엄마의 고향 하동, 성두마을 뒷산에서 봄날 직접 따온 머위와 두릅, 쑥이 제일 좋다. <맥주> 좋아하는 펍의 바 자리에 혼자 앉아 맥주 마시길 좋아한다. 시집을 읽거나 좋아하는 브루어리 맥주를 마시고 떠오르는 색감을 그림으로 담는 순간, 한 발자국 더 맥주를 사랑하게 된다. <그림>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르누아르다. 르누아르가 돈 받고 그린 그림을 좋아한다. 특히 피아노 치는 소녀들, 그 그림이라면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다. 소녀들이 꽃과 나무 사이에 폭 안겨있는 르누아르의 그림도 사랑한다. 직접 그림을 그릴 땐 거침없는 편이라, 오랜 재료 탐구 끝에 시넬리에 오일파스텔에 정착했다. 단숨에 감정의 순간과 분위기를 담는 그림을 그린다. <공간> 내가 머무르는 공간이 나를 닮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닮고 싶은 모습으로 공간을 꾸리는지 모른다. 작업실 미하다 그리고 살기좋은 미나문구(맹그로브 1706호)가 나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현재의 취향 결정체이다. <물건> 닮고 싶은 속도의 물건을 곁에 둔다.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느린 속도로 하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물건이 좋다. 이왕이면 에어팟보다는 CD플레이어를, CD플레이어보다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카세트 플레이어보다는 진공관 턴테이블을, 진공관 턴테이블보다는 축음기를 사랑한다. 물론 사용 빈도는 반대 순서다. <보라색> 어쩔 수 없이 지금 가장 사랑하는 색깔은 보라색이다. 무지개의 가장 마지막인 보라처럼, 오래도록 보라색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여기까지 취향을 생각해 보니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감사하게도 나는 현재의 사람들과 취향을 자주 나눈다. 새로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집에 살고 있기에 취향 홍수에 빠져있다. 지난달, 맹그로브 이웃들과 <집시팟>이라는 이름으로 한남 서울집시부터 종로 서울집시까지 다녀온 경험은 단순한 모임이나 약속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 같다. 내 취향을 소개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미나님은 왜 서울집시를 좋아해요?’라는 질문에 활기차게 대답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내가 서울집시를 좋아하는 이유, 맥주에 빠지게 된 사건, 맥주와의 첫 만남, 벨기에 맥주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등 나의 맥주 이야기는 찐하고 다채롭다. 그 중심에 있는 서울집시를 소개하고, 내가 이 브랜드를 응원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넘치도록 행복했다. (사전에 우리 집 맹그로브 근처 펍, 타일러에서 서울집시 환상을 차곡차곡 쌓길 참 잘했다.) 집시팟 이후에도 우리는 다양한 취향을 나누었고, 이웃을 넘어 친구가 되는 중이다.

 그래. 나의 취향을 다듬어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아, 처음 독립하던 순간에도 다짐했다. ‘내 눈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내 방에 들어올 수 없어’ 결국 꼭 필요한 물건은 없는 불편한 방이 되었지만(대표적으로 쓰레기통과 세탁 바구니가 없음)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 종종 축음기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낭만적인 집이 되었다. 시각적으로 1706호는 충만하도록 아름답다. 그래서 작년 여름 내 방을 전시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방으로 초대하고, 취향으로 가득한 공간을 함께 기억해 주길 바랐다. 내가 사라져도, 누군가의 기억으로 이 공간이 마음에 남기를 소망했다. 쉼 없이 사진과 글로 기록한 첫 번째 집을, 나와 함께 직접 보고 느끼며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결국 취향을 가진다는 건, 나를 사랑하기 위한 밑작업이다. 수많은 시간과 시도로 취향을 만들 수 있다. 삽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른 이의 취향을 탐해보고, 이건 아니라며 깨져보고, 노력도 해보고, 노력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취향임을 깨닫고, 내 취향이라고 실컷 자랑해 보고,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져 봐야 한다. 그래야 자기다운 취향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남의 것을 탐하고 따라 하다가 좌절도 해보고, 네 취향이 멋지다는 말을 들어도 인정하지 못하던 시간을 지나서, 이제는 알겠다. 무너진 시간 덕분에, 부서진 취향 덕분에, 지금의 취향을 가질 수 있었다.

 아아 사실 운동에 취향이 없다. 언젠가 내 취향의 운동은 요가라고 소개하고 싶다. 살기 위해 운동을 미룰 수 없게 되었고, 요가원을 찾아갔다. 서른한살의 여름, 처음으로 요가원을 등록했다. 그런데 명상 수업만 꼬박꼬박 들었다. 명상을 좋아하니까, 한평생 운동과 동떨어져 살 수 없으니까, 움직임 명상인 요가를 하고 싶었다. 사실 운동으로서의 요가가 아닌, 명상의 한 종류인 움직임 명상을 하고 싶었다. 정적인 수련을 하고 싶었다.

요가가 취향이라 말하려면 시간을 더 보내야 것 같다. 좋아하긴 하지만 애쓰는 마음이 강하다. 너무 애쓰는 건 아직 취향이 아니란 뜻이겠지. 요가를 안 하면 불편할 만큼의 꾸준한 시간을 모아야겠다. 좋아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때때로 느슨하게 때때로 끈끈해야지, 그런게 취향이 아닐까? 오늘도 요가원에 다녀왔다. 부디 내일도, 모레도 요가를 향한 마음이 여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