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14. 수요일 pm 6:30 / 작업실 미하다 옥상

 이상할 만큼 무기력하고 게으른 시간이 찾아왔다. 추석을 시작하며 몸이 무겁다는 핑계로 평소 눈 뜨는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 늦잠을 잤고, 낮잠도 잤다. 잠, 너는 그토록 원하면 멀어지고, 느슨해지고 싶으면 성큼 다가온다.

 민족 대명절 한가위 아니겠는가. 가족과 함께 대명절을 보내고자 본가에 갔다. 스스로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건강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 집에서 보낸 2박 3일, 동네 뒷산으로 등산도 다녀오고 명상 시간도 잘 챙겼다. 최장 기간 명상 신기록, 28일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명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9월 11일 늦은 밤 맹그로브로 돌아왔고, 9월 12일부터 명상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엄마와 혜주와 아빠가 있는 집에서 몸은 편했는데,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본가에서 쓴 일기를 꺼내 다시 읽어봤다.

 2022. 09. 10. 토요일 pm 12:16 / 뒷산 나무 그늘 정자

 내내 엄마와 혜주 속도에 시간을 보내다 체할 것 같아서 뛰쳐나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와 혜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 와서 집이 그리운데,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맹그로브를 집으로 인정한 것 같은데, 나 신설동 가서 쉬다와도 될까?”

 집에 왔는데 지친다. 자꾸 뭘 해야 하니까. 아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잠시 뛰쳐나왔다. 아무래도 연휴 내내 집에있는 건 힘들겠다. 일요일 저녁에 맹그로브로 돌아가야지.

 다시 2022. 09. 14. 수요일 일기로 돌아와서,

 지난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알겠다. 엄마 집에 없는 울타리가 나의 집에 있다. 마음이 안전한 울타리, 여기 쏙 들어와 마음을 톡 내려놓았다. 시선을 피할 수 있어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결론부터 털어놓자면, 편안함이 게으름으로 이어져 버렸다. 본가에서 혜주랑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 죽음의 성물 1, 2편을 봤는데, 맹그로브로 돌아와서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아즈카반의 죄수, 불의 잔을 봤다. (으아니 세상에, 불사조 기사단을 안 봤다.) 아껴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마지막 화와 빅마우스 1~14화를 요약 버전으로 몰아보고 잘 기억나지 않는 유튜브 콘텐츠까지, 약속 없는 마지막 연휴를 그런 시간으로 꽉 채워 보냈다.

아쉽다. 명상을 딱 2일만 더 했다면, 매일 명상하기 30일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글을 쓰다 멈추고 명상 앱을 켰다. ‘현존과 초심’이라는 주제를 골랐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마음 같았다.

 명상을 마치고 다시 연필을 들었다. 주섬주섬 <명상 일지>를 꺼냈다.

• 명상 시간
  저녁 6시 37분 ~ 6시 53분, 약 16분
• 명상 주제
  현존과 초심 : 현존이란 현재로 돌아와서 현재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현재만이 실제한다. 과거는 이미 다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만이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순간이다.
• 명상 수련 중 느낌이나 신체 감각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태풍의 영향권에 들었는지 ‘난마돌’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연필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 덕분에 명상 시작 1분만에 눈을 떠버렸다. 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눈을 감고 다짐했다. 외부 환경을 수련에 이용해보자. 이 거친 바람 속에서, 꼿꼿하게 작업실 옥상을 떠나지 않고, 맥주 한모금 마시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채로 명상을 이어갔다. 이후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제 미하다 일기장 마감을 지키지 못한 마음의 부채감, 하반기 행사와 담당 업무 고민,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여기, 호흡으로 돌아왔다.
• 명상 수련 후 감정
  오늘의 명상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로 돌아올 때 내 마음은 회복하고, 고요해지고,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현재 속에 존재할 때 자동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이 아니라, 보다 현명한 대응으로 새로운 시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지나간 과거(어제의 마감을 지키지 못한 마음의 빚)을 털어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미하다 일기장 초안을 다시 쓰는 것)을 선택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마감요일 화요일도 다 지나갔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화요일의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면, 수요일에 해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오늘 보내면 되는거야. (물론 쉽지 않겠지..)
   이어서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늘 새로운 마음이 된다. 바로 초심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가지는 새롭고 신선한 마음, 새해 첫날 첫 아침에 가지는 마음, 새학기가 시작될 때 학생들이 가지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직장에 들어간 첫날 직장인의 마음 가짐, 그 순간을 다음 새해, 다음 학기, 다음 새 직장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마음, 초심이 된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초심으로 현재를 사는 것, 그게 지난 이틀 동안의 나에게 필요했다. 해리포터를 보면서, 드라마와 유투브를 보면서 나는 현재에 머물지 못했다. 호그와트에 있었고, 드라마 속에 있었다. 명상을 마치고,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의 내가 잃어버린 마음과 ‘지금 이 순간’을 되찾았다.

 미하다 일기장 첫 페이지를 보낸 초심, 나에겐 그게 필요했다. 15분의 명상을 마치는 말이 기억난다. “새로운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합시다.” 신기하다. 정말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새로운 내가 새로운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루 늦었지만, 발행이다!

 - 초안 다 쓴 시간 pm 7:00, 퇴고 마치고 발행한 시간 pm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