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일기 쓰는 일을 사랑한다. 다정한 나무 냄새를 풍기는 미색 종이, 부드럽고 진한 2~3B 연필, 특히 새까만 블랙윙 매트 연필로 초안을 쓰면,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 글 쓰는 일은 마음의 때를 미는 것처럼 후련하고 시원한 일이다.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까지 가장 솔직하게 털어둘 수 있다. 이번 주 미하다 일기장을 화요일에 보내지 못한 건, 평소보다 초안을 더 오래 썼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쓴 일기를 다시 펼쳐 보기 두려워서 시간에 틈이 생기면 쓰고 또 썼다. 정말이지, 혼란스럽고 조심스러운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문장을 다듬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일기장에 덮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괜히 연필과 맥주 탓을 해보고 싶다. 월요일에 눈이 번쩍 뜨이는 자연발효(Spontaneous Fermentation)방식으로 만든 맥주를 만났다. '오랜 시간 발효 후, 세이보리, 오레가노, 로즈마리 등이 블렌딩된 프로방스 허브를 더했다'는 설명을 읽는 순간, 이미 맥주를 마신 것처럼 황홀했다. 업무를 마치고 바로 서울집시로 달려갔다. 맥주를 사고, 한 잔을 마시고, 이번주에 쓸 연필을 깎았다. 서울집시 마스코트 슉이 덕분에 내가 사랑하는 연필을 소개했다. 연필에 몰입한 마리님을 바라보다가 벌컥- 연필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보았다. 마침 가장 사랑하는 연필이 마음에 쏙 든다는 그녀에게 연필을 한 자루 선물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연필을 사랑하는 이유는, 연필 속에 숨은 흑심을 태워서 흔적을 남겨주는 필기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흔적을 남겨주는 연필에게 고맙다. 샤프나 만년필 같은 도구는 자기 몸이 줄어들지 않는데, 연필은 쓸수록 연필의 몸이 작아진다.’

 왼쪽에 있던 남자분은 이렇게 말했다. '연필로 태어나기 위해 흑심은 이미 한 번 탔다. (정확히는 흑연과 점토를 반죽해서 구워준다) 그럼에도 이미 한 번 탄 것을 다시 태운다는 표현은 (…)'라고 말했다. (…) 부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흐릿하게 '멋지다'라거나 '그런 표현도 꽤 괜찮다'정도의 긍정적인 말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연필을 사랑하니까, 연필을 향한 내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고 자신할 수 있으니까. 연필과 관련된 책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데, 연필을 만드는 원리를 박물관에서 공부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흑심을 태워서 글을 쓰겠노라 말할 것이다. 자기 몸을 태워내는 새까만 흑심을 보면, 새까만 속마음까지도 일기장이 받아줄 것 같다.

 2022. 09. 28 수요일 am 5:06

 연필을 태우다 갑자기 어느 날의 황홀한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운 것은 대화의 깊이일까, 대화의 온기일까? 아주 작은 설렘만 느껴도 불안하다. 지난 4년 동안 힘겹게 되찾은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렵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또 나를 잊고, 잃게 되는 일은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든다. 작은 촛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밝은 호롱불일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압도되고 싶지 않다. 불은 한순간에 번지고, 너무 쉽게 타오른다. 내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까 겁난다. 차라리 꺼진 모닥불에 남은 잔잔한 온기라면 좋겠다. 

 가을이다. 흑심처럼 까만 맥주를 찾게 되는 계절이다. 칠홉스의 데카당트를 주문하고, 문득 그 뜻이 궁금해졌다.

 Decadent : 타락한, 퇴폐적인

 단어 자체로는 퇴폐, 쇠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문예사조에서의 데카당트는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르누아르’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림은 아름다워 한다* 라고 말하던 그의 그림은 아름답지만 퇴폐적이었다. 르누아르의 기억을 조금만 꺼내보자면, 열여섯-가장 사랑하는 그림과 화가를 정했다.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었다. 미술시간에 한 학기 동안 명화 따라 그리기를 하는데 수채화로 유화 그림을 따라 그렸다. 매일 그림을 째려보다가 정이 들어버렸다. 열여덞-르누아르 전시에서 그의 진짜 그림을 보던 날, 그가 그린 행복과 내가 느낀 퇴폐적인 아름다움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울지는 못했다. 일기를 쓰고 있는 오늘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림은 시리도록 차가운 소년과 고양이였다. 이런 그림도 그리는 화가였다니!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충격적이다.

 데카당트와 예술과 르누아르, 내가 사랑하는 예술은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쇠락과 퇴폐라는 단어가 아름답게 들렸고, 죽는 순간까지 르누아르의 그림을 사랑하기로 약속했다.

*앗, 정확히는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맥주로 돌아와서, 데카당트를 마시다 보니 서울집시의 피스오어러브(peace or love)가 땡긴다. 올겨울에도 '사랑' 대신 '안온'을 선택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직 나에게 쏟을 사랑이 부족하니까, 조금 더 혼자여도 좋겠다. 지난 7년 동안 나보다 당신을 사랑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아직 사랑할 자신이 없다. 이제서야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삶의 우선순위가 내가 아니라 네가 될까 봐 그게 두렵다.  

 지난 사랑은 너무 강렬하고, 짙었다. 이제는 잔잔한 사랑을 바란다. 깊고 잔잔한 호수 같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의 나무가 되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뜨거운 여름날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처럼, 그런 사랑이라면 나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09.27 화요일 아침

 아아, 봄과 여름에는 온 마음을 나로 채울 수 있다.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내 세상을 펼친다. 가을은 또 나를 무너뜨리고 있다. 부서진 나비의 날개를 닮은 낙엽 하나가 울타리를 허물고 세차게 흔든다. 부디 모든 계절의 모든 마음이 내 것이면 좋겠다. 아직은 마음도, 시간도, 공간도, 생각도, 그런 사랑으로 채울 자신이 없다.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작업실 미하다, 글과 책과 꿈과 그림이 있다면 그런 사랑을 하지 않아도 충만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사랑이 우울과 불안의 동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별의 계절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상상한다.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손을 잡고, 우리를 쓰다듬고 싶다. 가을을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가을이 사랑이 될 수 있다면, 침대 아래 숨겨둔 일기장을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일기장을 꺼내지 않아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 09. 29. am 5:43 모닝페이지 마지막 문장

 대상이 없는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갈망은 떨어지는 낙엽 같다. 가을에 어울리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