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12:06pm

 갑작스럽게 이웃의 방에 초대받았다. 잠이 깨지 않아서 담배를 피우다 아는 얼굴을 마주치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카톡을 보내고 ‘저희 집으로 오세요’라는 말에 부랴부랴 방으로 올라갔다. 페브리즈를 머리카락부터 온몸에 뿌리고, 손을 3가지 비누로 씻고, 10층으로 내려갔다. 초대받은 방에서 우리는 각자의 일을 했다.

 우선 연필을 다섯 자루 깎았다. 연필을 깎는 행동은 글쓰기를 이어가는 나만의 의식(ritual)이다. 뾰족하게 연필을 깎으며 마음도 깎아본다. ‘다가올 한 주도 모두 연필로 적어야지, 기록하고 또 수집해야지’라는 다짐이 담긴 글쓰기 준비운동을 한다. ‘영원은 그렇듯’을 들으며 연필을 깎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여름의 끝자락에 찾아온 몽글몽글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끝난 관계, 끝낸 감정인데, 여전히 무언가를 바란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나에게 새로운 위로가 되어줄 단단한 그대를, 바란다. 단순하게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담을 수 없는 어떤 마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시넬리에 오일 파스텔을 챙겨왔다. 그리기 위해 마시는 오늘의 마링고는 따갑고 아프다. 무언가를 향한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꽃이다. 마냥 좋아하지만 마냥 단순하지 않다. 최근에는 주말마다 플로리스트들과 프로젝트를 했는데, 나 홀로 직장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스물여섯, 그때의 내가 광고대행사를 그만두고 꽃집을 했다면, 지난 시간이 더 수월하고, 행복했을까? 힘들지는 않았을까? 온 마음을 다해 그저 꽃을 힘껏 좋아하고, 배우고,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은 여전했을까?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꽃과 네 앞에서 더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귀에 헬레부르스를 타투로 남기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나와 꽃을 하나로 말할 수 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 꽃을 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의 나는 여전히 꽃을 하고 싶은 걸까?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 중에서, 무엇이 더 크고 무엇이 더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쓰는 것조차 벅찬 마음을 미하다 일기장에 보내도 될까? 

 10월 24일 9:55am 대화 명상

 명상 수업을 듣지 못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컨디션을 체크하는데, 에스프레소 4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셔서 잠을 잘 못 잤다고 대답했더니, 오늘 명상이 힘들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도 수련을 할 건지 대화를 나누다 갈 건지 물어보셔서, 대화를 나누다 왔다. 명상 수련 일지 말고 대화 조각을 수집하며 생각을 기록한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결론에 먼저 도착할 수 없다. 너와 끝이라 생각했다. 그럼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이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너와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우연히 만난 날이었다. 너는 나에게 오늘이 마지막이라 말했고, 나 또한 끝이라 응했다. 며칠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앞서 내린 결론에 버티며 살아가기 힘들었다. 모든 게 끝이라고 다짐했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기에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쉬이 잠들지 못한 지난밤을 떠올려본다. 네가 나의 호수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켰고, 나는 그 울림에 힘껏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나의 예술과 그림과 글과 책

 어떠한 대상, 사랑과 같은 감정, 현재의 온 순간을 글과 그림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 대상이 사라져도 손에 닿는 무언가로 남길 수 있다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 타인에게 닿고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다.

 반드시 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너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가 그리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이니까. 아주 강렬한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마음을, 감정을, 혼란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귀한 일이라고 명상 선생님은 응원해주었다. 그래, 지금은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너와의 관계를 이어간다면 나의 그림과 글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조금 더 용기내도 될까? 내년에 책이 세상에 나오면, 네 이야기가 담긴 책을 들고 너를 만나러 가도 될까? 너를 만나 직접 전하지 못하더라도, 책 한 권은 너에게 보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