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필을 깎았다. 아침 글쓰기도 10일이나 거르고, 일기장은 10일 만에 꺼냈다. 우울감, 무력함, 나른함, 무기력해서 하던 일을 다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 연필로 일기를 쓸 때는 감정을 생각나는 순서로 나열한다. 그리고 미하다 일기장을 보내기 전, 감정 카드를 꺼내서 지난 감정을 마주보고 제대로 정의한다. 이번에는 퇴고보다 힘든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일기장에 나열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감정 카드를 활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답답하거나 막연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연필로 일기를 쓰는 일이 ‘감정의 배출’이라면, 미하다 일기장을 보내는 일은 ‘감정의 정화’였다.

 꽤 오랜만에 동굴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동굴의 시작점이 생리 1주일 전이라는 건 정말 웃기다! 호르몬은 핑계로 쓰기 딱 좋다! 동굴에 들어가던 날은, 아침 글쓰기 노트를 다 써버린 날이었다. 54일이나 꼬박꼬박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글을 쓰고, 새 노트를 주문한 참에 딱 하루만 거르고 넘어가려다 10일이 지났다. 하루가 무너지니까 또 다음날이 무너졌다.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하루를 성실하게 잘 살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 아침을 잘 보내는 것이 나의 큰 행복인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 좋아하던 일도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눈에 띄게 빠진 건 딱 2가지였다. 아침 글쓰기와 명상.

 그럴 수 있다. 사실 자주 겪은 일이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태연하게 다시 잘 살아왔다. 고작 10일이었지만, 꾸준하던 54일보다 감정의 흔적이 짙게 남았다. 다시 놓지 않으려고 나를 꽉 부여잡고 있다. 동굴에 깊고 길게 들어가고 싶지 않다. 다짐을 담아서, 동굴 노트를 만들었다. 언제 동굴에 들어갔고, 언제 나왔고, 들어가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나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들, 사람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또 하나, 별 노트를 만들었다. 지난 주말 시골에 갔다가 낡은 별자리 책을 발견했다. 그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요하고 잔잔하고 든든했다. 외할머니 댁 마당에서는 고개를 들면 바로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보였다. 2등성 별 2개, 3등성 별이 3개로 이루어진 카시오페이아는 서울에서 흔히 만나는 별자리는 아니었다. 별을 찾는 순간만큼은 다른 걱정들이 사라진다.

 서울로 올라와 별자리 책을 한 권 샀다. 해가 지기 전까지, 틈날 때마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한낮에 별자리 어플로 별을 찾았다. 동굴로 나오는 길에 오리온자리를 만났다. 오리온자리는 내가 처음 만난 별자리였다. 아주 어릴 때, 성당에서 겨울 피정을 갔을 때였다. 잊지 못할 두 번째 밤하늘이었다. 별이 많은 건 당연했고, 처음으로 하늘의 별을 이어 별자리를 찾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저 별과 저 별 보이지? 가운데 별 3개가 벨트, 그 아래 별 3개가 또 보일거야’ 말하는 대로 별이 보였고, 별을 이어서 별자리를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카시오페이아를 찾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로 별을 이으며 살았다. 자주 찾지 못하더라도, 별을 잊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동굴로 나오게 이끌어준 별을 더 알고 싶어졌다. 툭-툭, 저 별과 저 별을 이어서 별자리를 찾아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보이지 않아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항성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