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일요일 5:17pm 우동집

 작업실 옥상에서 꽤 오래 참아온 담배를 한 모금 마시고, 앨범 가사집을 읽었다. '예술 할 생각 말고 먼저 사람이 되어라.' 쾅. 허기진 마음이 수렁으로 떨어졌다. 결국 밥을 먹으러 작업실을 나왔다. 부쩍 기분이 안 좋아서 우동을 주문하고는 생리주기 어플을 꺼냈다. 이런, 오늘부터 낙천적인 기분이 서서히 줄어든다고? 왠지 기분이 똥 같더라. 이어서 조언도 읽어본다. ‘스스로를 여왕처럼 대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에, 그냥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우동 먹고 집에 가서 영화나 볼까, 어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봤으니까, 오늘은 <비포 미드나잇>이나 볼까. 아니지. 영화는 무슨, 생각해 보니 오늘 12월 들어 작업실에 처음 왔다. 심지어 미하다 일기장 마감일이 내일모레다. 지키지 못하는 마감이지만 매주 무언의 압박을 느낀다. 특히 요즘은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에 쓰는 모닝페이지 뿐, 일기도 자주 쓰지 않는다. 일상이 없으니 일기도 없다. 온통 ‘일일일일’ 뿐이다. 일에 대한 마음은 굴곡이 심해서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담을 자신이 없다. 한 번은 써야 할 주제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 우동이 나왔다! 우선 먹고 생각하자.

 내가 하고 있는 경험들이 내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쓸 수가 있나? 내가 말을 멋지게 했는지, 내 말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 없이 요즘은 내가 하는 말들이 일단 말이 되는지부터 확인해 보고 싶다. _ 생각이 방 안을 돌아다녀, P.17-19

 6:41pm 다시 작업실 미하다

 우동을 먹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겨울의 미하다는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차라리 빨리.. 호르몬의 노예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급하게 먹어서 소화도 안된다. 어으-

 뭐라도 쓰려고 붙잡고 있는 게 기특한데 한편으로는 가엽다. 부쩍, 또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예술과 문학 근처에 있을 것 같다. 요즘 자주 듣고 있는 노래에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사에 가슴이 끓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그토록 갈망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종이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비싼 일기장과 비싼 연필과 비싼 재료를 곁에 두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확실히 하나 알 수 있는 건, 요즘 하고 있는 일들 중 하나가 부쩍 이런 생각을 짙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내 것'을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예술'이라는 주제로 분류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를 위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래, 쓰는 일은 그저 나에게 다정하기 위함이다. 일기를 보내는 건 열에 아홉 부끄럽지만, 나중을 위해 쓰고 보내야한다. 멋진 문장을 만들 자신은 없지만, 일기장의 문장은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다. 그런 시간 속에서 한없이 불안하다.

 이 불안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다.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불안은 아님을 알고 있다. 이런 외로움은 오직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연필로 쓴 일기를 노트북에 옮기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걷다 보면, 막연히 바라고 있는 어떤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몰라도, 계속해서 걷고 싶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옳은 방향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되돌아오는 것이 두려워 포기해버리면 더 커다란 힘듦이 기다릴 것 같다. 그래서 쓰고 또 쓴다.

 곧 퇴고 여행을 앞두고 있다. 마냥 즐거운 시간은 아닐 거다. 그럼에도 가장 사랑하고 싶은 나의 모습 '쓰는 나'를 위해서 쓰는 일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가 닳도록 쓰고 또 쓰다 보면 새로운 것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처럼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더라도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일기장을 꺼내야지. 오늘도, 내일도, 내일 모레도, 쭉,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쓰는 힘을 잃지 말아야지.

 12월 18일 일요일 9:54pm 다래민박

 보통 지난 일기를 다시 읽지 않는데, 일기를 쓰기 전에 지난주 일요일 일기를 읽어봤다. 오늘 [구름의 나날]을 읽다가 눈물이 흐른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책을 옮긴 옮긴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유 없이 시작된 무거운 마음이 나를 짓누르고 점점 더 가라앉아 밤까지 쫓아올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내 안에 피어나는 꽃이 될 거란 것을 알았다면 조금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시절의 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둡고 슬픈 순간들이 있어도 그저 잠시 멈추어 기다리면 삶은 기어이 다시 향기로워질 테니까. 구름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란 걸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만약 당신에게 구름의 나날이 찾아온다면, 피어날 꽃을 위해서란 걸 기억하길 바란다. _ 구름의 나날 옮긴이, 정림

 불안과 우울의 구름이 짙게 드리운 시간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구름 동굴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그림처럼 멈춘 구름이라면, 직접 바람을 만들어보자고, 밖으로 나가서 두 발로 뛰어서 직접 바람을 만들어보자는 다짐으로 오늘의 일기에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