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일기 쓴 장소 : 작업실 미하다

편지 쓴 장소 : 맹그로브 20층

오늘은.

일기장의 첫 문장은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아주 평범하지만 차곡차곡 오늘을 모으기 위한 좋은 단어다. 지난번에는 1년간의 오늘을 모아 독립 일주년을 기념하는 일기장을 보냈다. 다 쓰지 못한 ‘오늘’들을 모아서  그다음 주에 보내려고 했는데, 아이쿠 또 동굴에 들어가 버렸네. 이럴 땐 하나하나 되감아 봐야 한다. 지난주 토요일에 수박과 그림책 클럽 모임도 잘 진행했고, 맹그로브 숭인점에서 MSC도 듣고(너무나 만족스러운, 손에 꼽는 MSC였다!) 숭인에서 한남으로, 다시 종로까지 ‘집시팟’이라는 모임명으로 신나게 놀고 마셨고, 일요일에는 작업실에서 명상 선생님과 시간을 보냈다. 뭐지? 어디가 문제였을까?

쿵쿵.

이번 동굴행은 5일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에 속했는데, 3주 동안 쌓은 아침 명상 습관을 무너트리기에 딱이었다. 그리고 유독 불안했다. 숨이 턱 막히는 쿵쿵거림은 불쾌했다. 그 불안함은 어디서 왔을까. 해야 하는 일을 미뤄서? 요가, 명상, 미하다 일기장 보내기 등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이사를 결심했지만 애매한 미련이 발목을 잡아서? 사실 난 자신이 없다. 새로운 집에서 더 잘 살아볼 자신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집 구하기를 겨울엔 춥다고 미루고, 여름엔 덥다고 미루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혼자만의 동굴을 만들고, 꾸역꾸역 들어가서 초라한 모습으로 시간을 버리는지 모른다. 이런 솔직한 마음까지 ‘일기장’에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나를 보여줄 수 있을까? 보통의 일기는 연필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는데, 오늘은 다르다. 연필이 거름망이 되어버린 것 같다.  솔직함은 물처럼 흘러가고, 찌꺼기만 남은 기분이다. 거기다 지금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이주영 LP)들은 나를 더 깊은 동굴로 데려간다.

맹그로브에 처음 살기로 결심했을 때, 혼자서 잘 살아보고 싶었다. 아주 잘. 처음엔 그 대상이 엄마였고, 가족이었다. 인스타그램 속에서는 불특정 다수가 되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웃이 생겼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계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빵 굽는 냄새로 이어진 대화, 밥 먹었는지 물어보는 안부 인사가 자연스러운 이웃, 총각김치를 마음껏 꺼내 먹으라는 인심, 새해에 떡국을 함께 먹다가, 선물 받은 고랭지 수박을 나눠 먹자는 연락에 지독한 노래방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는 이웃이 생겨버렸다. 나는 딱히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람이 좋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려웠다. 느슨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찰나의 순간이 쌓이며,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동굴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도토리 시간*이었다. 아주 좋은 날이면 작아져, 동굴 문을 열고 도토리 시간을 보냈다. 혼자만의 불편한 여행이었다. 볼품없는 모습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다. 도토리처럼 작은방에 몸을 숨기고,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아주아주 심심해지면 문을 열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도토리 시간은 그렇게 넘겨버렸다.

우리 집에는 멋진 사람들이 참 많다. 부지런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사람,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해 나가는 사람, 자기만의 색깔이나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 사랑과 배려가 넘치는 사람,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더하면 맹그로브에는 멋있는 사람들이 가득 살고 있다. 멋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영감과 자극을 받고 있다.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심지어 집이라는 브랜드까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문득 다시 ‘도토리 시간’ 속 주인공처럼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여유를 찾을 때까지 다시 나만의 세상으로 떠날 때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를 중심에 두는 힘을 채운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방법, 그러니까 도토리 시간을 끝내는 방법은 꽤 간단하다. 우선 심심함을 충분히 느낄 만큼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뇌과학 책에서나 강조하는 것처럼, 집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며 걷고, 뛰고, 운동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끼니를 잘 챙기고, 일기까지 쓰면 더할 나위 없다. 그렇게 ‘오늘’을 되찾는다.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자꾸만 오늘을 잃어버린다. 다시 오늘부터, ‘오늘’을 수집해야지. 이렇게 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고, 아마 또 다시 동굴로 들어올테지.

동굴에 들어가더라도 다시 나아갈 힘을 꾸준히 쌓아야겠다. 일기장을 보내는 건 그런 일이다. 도토리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나의 구석*을 글로 전하는 일. 무사히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오늘도 무엇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