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7일 11:41pm - 8월 18일 1:31am

일기 쓴 장소 : 타일러, 소리낫소리, 맹그로브 1903호

오늘의 노래 : 그것만이 내 세상_들국화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다. 어쩌면 이미 금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피했던 현실이, 결국,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내 전부였던 세상이.

 2주 만에 출근한 수요일이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는데,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지난 6월에도 화장실 천장, 전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 적이 있었다. 오늘로 세 번째였다. 앞서 두 번은 뚝_,뚝______,뚝____________ 정도로 속도로 떨어졌는데 이번엔 달랐다. 뚝뚝.뚝뚝뚝뚝.뚝뚝뚝.뚞뜍뚝뚜두둑.뚜루륵.쏴아아- 그렇게 화장실를 워터파크 개장했다. 화장실 전구를 통해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상황에 심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웃겼다. 시설팀에 전달하기 위한 동영상을 찍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우연히 만난 맹그로브 이웃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다가 웃었다. 아, 작업실 미하다에서 물 새는 건 정말 귀여운 수준이었다.

 사실 화장실에서 물 새는 문제는 오늘의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정도 쯤이야’ 라며 회피하던 나였다. 맹그로브 계약 기간을 1년 연장하는 전자 계약서에 서명한 다음 날, 화장실에서 물이 샜다. 윗층 객실 보수 공사를 마쳤다는 말에 ‘그러려니~’ 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은 시간을 쏟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고,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아왔다. 사실 그래서 이사도 못했지.

 두 번째 포인트는 또 사람 좋은 척, 밝은 척하고 있었다. 더 과하게 웃고, 더 과하게 밝아졌다. 오늘 회사에서 실장님과 2022년 성장 문답 인터뷰를 했는데, 작년 성장 문답 인터뷰가 떠올랐다. ‘미나님은 어떤 척을 자주 해요?’ 신박한 질문이었다. 내 대답은 이렇게 적혀있었다.  

 미나: 밝은 척.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 더 과장하게 된다. 직장 생활하면서 더 심해졌는데, 아주 옛날부터 그랬던 것도 같은데,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 같다. 사실 오랫동안 나는 ‘아무렇지 않은 상태’는 곧 우울한 상태라고 생각해 왔다. 최근 어떤 책에서 '아무렇지 않은 상태는 그냥 아무렇지 않은 상태다'라는 내용을 읽고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0의 상태 즉,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하며 '감정을 격하게 느끼는 것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든 감정을 깊게 경험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고, 감정은 흥미로운 글감이 될 수 있으니까.

 뛰어난(?) 감수성으로 인한 공감 능력은 현재 나의 활동(우리 팀의 일도 그렇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타인의 감정에 열심히 공감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지도 않고 그게 더 본인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 '아무렇지 않은 상태. '긍정(+)과 부정(-)의 상태가 아닌 ‘0의 감정’도 괜찮은 거다' 라고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무감정의 상태는 여전히 낯설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기도 한다.

 오늘 화장실 문제를 마주하며, 애써 밝은 척했다. 그러니까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나와 약속한 ‘선’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바로 올라와준 시설팀 직원에게 미운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은 글과 다르다. 글은 밉게 써도 예쁘게 고쳐 쓸 수 있지만, 말은 한번 내뱉으면 고칠 수 없다. 그치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조금은 화를 내고 싶었다. 쿨한 척, 상황을 애써 웃어넘기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온 방식에, 내가 정한 말의 기준에 의구심이 들었다. 오히려 짜증 내고 화내는게 맞는 거 아니야? 더 괜찮은 척하다니, 이거 맞아?

 방금 테드랑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다 깨달았다. 사실 웃고 싶지 않았다. 괜찮은 척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상황을 콘텐츠로 만들며 쿨한 척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포지션의 <하루>를 부르다가 눈물을 만들었다.‘울 수 없으니 웃어야죠’ 딱 이 가사에서, ‘나 사실 울고 싶었구나.’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내가 부른 노래는 <00:00> 내일 조금 더 나아지겠지, 오늘 이 하루가 끝나면 내일은 더 괜찮을거라는 가사에서 희미한 희망을 찾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물이 올라와서 마이크를 자주 내렸지만, 테드라 다행이었다. 쿨하게 각자의 코노길만 걷는 사이라서 들키지 않았다. 마지막 곡은 스윗스로우의 <그대에게 하는 말>  아 김테드 선곡은 무섭다니까. ‘Don’t cry, Don’t cry, Don’t cry, Don’t cry, Don’t cry,’ 돈 크라이를 5번 부를 때, 나는 울고 있었다. 김테드는 몰랐겠지만. 미하다 일기장 구독자가 아닌 테드는 오래도록 모를테지만.

 지난주 토요일 [나에게 편지 쓰기] 모임 파일럿에 초대되어 서로의 편지를 낭독하다 눈물을 보일 때, 나만 울지 못해서 아쉬웠다. 자신에게 쓴 편지를 읽다가 감정에 충실히 눈물을 보일 수 있는 N님, 내 편지 낭독에 눈물을 대답하는 E님이 멋있었다. 나도 잘 우는 사람이었는데, 만 30세가 되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지난 토요일, ‘일기쓰다 자주 울었는데, 올해는 한 번도 울지 못했어요’라고 말하고 울고 싶다고 고백한 지 딱 5일이 지났다. 이렇게 빨리 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화장실 문을 열면 왕왕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장실 천장에서 조명을 떼어낸 구멍에서부터 욕조까지 설치한 길고 커다란 비밀에서 풍기는 꿉꿉한 냄새를 맡으며 퍼엉퍼엉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독립한지 1년 +. 7일차, 처음으로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아. 정말. 너무너무 집에 가기 싫다. 아이러니한 건, 이 일기를 쓰는 내가 지금 집에 있다는 것이다. 1층 소리낫소리 파란테이블까지도 나의 집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내 방에 들어가기 싫은거네?

 나의 두 번째 문, 1706호 문을 열면 언제나 위로와 작은 행복이 가득했는데, 오늘은 문을 열자마자 쏟아질 감정을 상상만 해도 힘들었다.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감당할 수 없는데, 방에 들어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집은 맹그로브가 아니라 양지마을이다. 엄마와 아빠와 혜주가 있는 진짜 집에 가고 싶다.

 새벽 한 시, 지금 집에 가면 엄마도 아빠도 혜주도 놀랄 것 같아서 신설동역 호텔을 검색했다.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다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화장실 불을 끄고, 작은 조명을 하나 켰다. 어두우면 잘 안보이니까, 최소한의 불빛만 만들었다.

 [2022. 08. 18. 목요일 am 01:31]

 아까 타일러와 소리낫소리에서 일기를 쓸 때는 화가 너무 많이 났다. 화장실을 향한 화보다는, 나에 대한 화가 훨씬 컸다. 시설도 물론 문제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 나의 대처 방식, 내가 지켜오는 내 삶에 대한 태도,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 두통이라니. 최대한 외면한 이사 문제, 반면 언제나 모든 것이 좋을 때 방향을 바꾸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왜 이렇게 머무르고만 있을까’ 스스로를 한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사실 오늘 성장 문답 인터뷰에서 나에게 손해가 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변화를 무서워하고 안전한 것을 좋아한다고. 그동안 해오던 것을 꼭 끌어안고서 기존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물론 성장을 위해 바꾸고 싶지만,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는 건 나에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서 맹그로브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방이 조금 아니 많이 좁지만, 참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첫 독립이었으니까, 적어도 화장실에서 물이 새기 전까지는 퍽 좋았다.

 화장실 워터파크를 개장 후, 독립 만족도가 70%에서 20%로 뚝 떨어졌다. 화장실은 생존의 문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사는 건 중요한 일이다. 당장 내일부터 적게 먹고, 물은 최대한 적게 마셔야겠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중, 인스타그램에 올린 스토리에 답장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