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기로 했어. 방금 페루 커피를 주문했고, 커피가 나오기까지만 슬픔을 즐겨볼까 해.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 제목이 뭔지 알아? ‘어쩌겠어요, 내 마음이 그렇다는데’ 참 웃기지? 나는 밤보다 이른 아침에 네 생각이 나. 오늘 새벽에는 요가 수련을 하고 왔어. 스트레칭 중심 수업이었는데 몸 구석구석을 풀고 낯선 자세에 도전했지. 몸 구석구석 숨을 불어넣다가 네 생각이 났어. 수련이 끝날 무렵 ‘나마스떼’의 의미를 알게 되었어. 양손을 곧게 피고 합장할 때, 왼손은 나 혹은 내가 믿는 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의 가치(나에게는 꿈과 책과 힘과 그림 같은 것)를 뜻해. 오른손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 상대방에 대한 깊은 마음을 의미한데. 아주 깊은 마음을 전하는 행동이 나마스떼야. 부끄럽게도, 수련을 마치고 내 앞에 있는 선생님이 아닌 네가 생각나버렸어. 아쉬운 마음으로 수련을 마치고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리운 건 너와의 대화일까, 달콤했던 밤일까, 그저 너를 안고 있던 시간의 온기일까 궁금하더라. 너를 처음 만난 날, 내 얕은 지식에 깊이를 더해주던 대화가 좋았는데, 어느새 네 다정함에 취했고 (아! 물론 맥주에도 취했지만) 그렇게나 황홀한 대화는 너무 오랜만이었으니까. 덕분에 요즘 내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절대 알 수 없겠지.

 너를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이 감정의 끝이 무서워 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우연히 만날 수 있기까지 11일이 남았다는 사실에 조금 설레는 것 같아. 네가 있을 그 장소에 나는 너를 만나러 갈까? 11일 후에도 내 마음이 이럴까? 내 마음이 매일 깊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10:22am

 역시, 나 너를 보러 갈래. 그날까지 마음을 다듬어서 마지막으로 너를 보러 갈 거야.

 2022. 10. 09. 일요일, 1:54pm /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너를 만나 내 삶에 파동이 생겼으니까. 마음속에 폭풍을 견디기 위해서 지금 사랑하는 일과 지금 이 순간에 더 몰입하며 살고 있어. 회사 업무에도 더 집중하고, 주말마다 야외 웨딩 꽃 작업을 하고 있어. 여전히 글도 쓰고 있어. 그런데 그림은 통 그려지지 않아.

 2022. 10. 10. 월요일 12:40pm / 작업실 미하다 노오란 감옥 책상에서

 오늘 일기를 쓰기까지 내가 한 일들

1. 하늘 실컷 보기 (비가 쏟아지기 전까지)
2. 인스타그램 하기 (무려 게시물을 2개나 올렸음)
3. 연필 깎기. 7자루 중에 3자루는 끝을 날카롭게 뾰족하게
4. 타자기 책상의 조명을 오늘 글쓰기로 마음먹은 노오란 감옥 책상으로 가져오기
5. 옥상에서 난로 꺼내기, 글쓰기 딱 좋은 온도로 만들기
6. 태엽 시계 돌리기
7. 오늘 일기 쓰기 좋은 브금 고르기 (쳇 베이커, 오늘은 재즈다!)

 얼마나 거창한 일기를 쓰겠다고 이렇게나 긴 딴짓이 필요했을까? 뭘 쓰려고. 지금부터 써보면 알게 되겠지. 어제 점심, 이 사랑을 처음 터놓은 맹그로브 이웃과 우연히 16층 키친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각자의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게 터놓고,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누리는 것, 하고 있는 일들, 업무적으로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건 크게 두 가지인데,

 12월 사내 송년회를 준비하는 일 _ 한 번쯤 일에 미쳐 일상을 올인해 보고 싶었다. 전사 행사는 광고대행사 마케터로 일하던 4~5년의 경력을 버리고, 커리어를 바꾸며 이 조직에 입사한 이후로 가장 해보고 싶은 업무였다. 지금까지 사내 행사에 관여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극히 일부였다. 최근 조직개편 덕분에 전사 행사는 우리 팀의 일이 되었다. 행사가 끝나면 감동의 눈물을 흘려보고 싶었다. 회고할 때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일에 몰입하면 네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요즘 좋아지기 시작한 내 일을 더 사랑해 보려고 한다. 아, 송년회 2달도 안 남았네. 우리 팀, 화이팅!

 사이드 프로젝트, 쓰고 그리는 일 _ 1의 본업에 영향을 주지 않을 강도로 꾸준히 뉴스레터 <미하다 일기장>을 발행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매주 일기장을 뜯어 보내고, 일기를 모아 독립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책은 2023년 1~2월 나올 예정이고, 3월에는 펀딩, 북토크, 작업실 미하다 전시를 홍보하고, 4월 1일부터 1달 동안 전시를 할 거다. 전시 기획은 E님, 책 디자인은 A님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제 글을 쓰고, 탈고를 하고, 탈탈고를 하고, 탈탈탈탈탈탈고를 하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 이 순간 ‘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고, 대답은 ‘재밌겠다, 해내야지. 할 수 있어!’였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친구가 미하다 전시 기획자가 되었다. 직장 생활 8-9년차, 지금까지 내가 만난 디자이너 중 단 한 번의 아쉬움도 주지 않았던 디자이너 A님, 협업 관계 속에서 존경하고 의지해온 디자이너가 책 디자인을 해줄 거라서 넘치도록 든든하다.

 이제 나는 창작 활동(창작 노동)에만 집중하면 된다. 취약한 부분은 든든한 E님과 A님께 부탁했으니까. ‘독립출판과 미하다 전시’ 이 두 가지 일이 단순히 나의 꿈이자 자아실현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물론 시작은 자기표현 욕구였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이자 보문동과 맹그로브 이웃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좋은 영향을 주고 말테다!’라고 애써 영감을 만들겠다는 말은 아니다. 책과 전시를 준비하는 협업 과정 속에서 개인의 삶에 작고 긍정적인 성장이, 조그맣고 귀여운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더 단단해져야지.

 그래서일까, 네가 그리고 싶다. 네가 나의 뮤즈는 아니지만 어느 화가들처럼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면 좋겠다. 나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대상을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너를 그리는 상상을 자주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너를 생각하며 쓴 나의 글을 좋아하고, 너와 다시 만나 밤을 보내고, 네가 잠든 사이 너를 그려보고 싶다. 너를 그리고 쓰고 싶다. 네가 떠나기 전에 너를 다시 만나야겠다. 일과 그림과 글만 생각하느라 네가 흐릿해진다. 조금만 더 너를 쓰고 그려내고 싶다. 어쩌면 이것도 사랑일지 모른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업무적으로 성장하는 일’과 ‘너를 통해서 글에 깊이를 더하는 일(네가 그리워 평소 쓰지 않는 단어를 꺼내는 일)’ 그리고 ‘감정이 아닌 대상을 그려내는 일’이다. 아, 이건 사랑이 아닌 걸까?

 이런 마음도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이기적인 모양이다. 너와 나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없는걸, 네 사랑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걸. 그러니까 내 방식으로 너를 쓰고, 너를 그리고, 이 사랑을 기록하고 수집할거다. 내년에 나올 내 두 번째 책에 너의 이야기를 꼭 담고싶다. 혹시 너와 내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마음을 글로 전하고 싶다. 너에게 닿지 않아도 괜찮다. 힘껏 이 감정을 글로 남기고, 후회 없이 너를 사랑할 테니.  

  나는 너를 사랑하기 시작한 그 장소에서, 일기장을 퇴고하고 있다.